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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험사례] 뇌간출혈에서 이소성골화증까지 앓던 사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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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체질
  • 작성일16-05-28 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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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간출혈에서 이소성골화증까지 앓던 사람이

한 ○ 자

 

평생 약을 먹어야 하는 갑상선기증저하증으로 인연을 맺다

내가 건강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은 중학교 때부터이다. 2학년 때 갑상선 기능저하증에 걸리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몸이 한 달 사이에 10이나 늘어나고 시간이 지날수록 몸이 둔해지고 걷기가 힘이 들어 병원을 찾아가 약을 먹기 시작하면서 더 나빠지진 않지만 약으로 완전히 나을 수는 없다는 걸 알았다.

약은 평생 먹어야 하고, 계속 먹던 약으로 속은 다 버려 뭔가 다른 방법이 있을 것이란 생각으로 헤매었다. 우연히 오빠가 보고 있던 선도체험기를 통해 오행육기 생식을 알게 되었다.

자신과 가족의 몸을 음식을 통해서 보호하고, 음식에 따라 영양을 해주는 것이 달라 병증의 원인을 찾아서 맞는 음식을 먹어주면 증상이 호전되며 치료가 가능하다니간단하면서도 획기적이고 어디서도 들어보지 못한 말에(90년대 초) 조금씩 강의 내용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선뜻 찾아 나서지는 못했다.

아직 경제적으로 자립을 하지 못 했기에 경제 활동을 시작하면 꼭 찾아가보리라 다짐만 했었다. 그사이 결혼하고 아기를 갖기 전에 약을 끊고 아이를 갖기 위해 선도체험기 저자 김태영 선생님의 자택을 찾아가 생식을 처음 처방 받아왔다.

생각보다 비싼 생식 값에 다시 찾기는 힘들었다. 아이가 3살쯤 되었을 때 감기만 오면 중이염이 생겨 집에서 가장 가까운 구리 생식원을 찾아가 아기 성장식과 내 생식을 처방 받아왔다. 확실히 아이에게는 효과가 빨리 왔다. 아이가 조금 단단해지고 변 모양도 좋아졌다. 기저귀에 변을 봐도 기저귀에 묻지도 않고 엉덩이도 닦을 게 없었다. 생식이 좋다는 것은 조금씩 경험을 통해 알게 되었지만 경제적으로 안정이 되지 않아 꾸준히 먹이기는 힘이 들었다.

 

대뇌출혈 뇌간출혈로

3년 후에 처음 집 장만을 하고 입주한 지 얼마 안 된 2003223일 새벽 4시쯤 자던 애 아빠가 일어나 앉아 나를 부르며 손을 잡고 쓰러졌다. 불러도 두드려도 반응이 없었다.

119에 전화를 하고 온갖 서랍을 뒤지며 바늘이나 찌를 것을 찾았지만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 사이 119가 오고 대학병원으로 실려가 MRI, X-ray 찍고 여러 가지 검사를 하며 기다리기만 했다. 다행히 진주 경상대학 병원에 알고 지내는 의사선생님이 있어 그리로 옮기고 빠른 조치를 취해줬지만 병원에서는 수술을 할 수가 없다고 했다.

다친 부위 차체가 손을 댈 수 없는 곳이라고 했다. 대뇌출혈 뇌간출혈이라고 했다. 관련된 자료와 책을 찾아보니 겉으로는 움직임이 없지만 속으로는 다 들을 수 있다고 되어 있었다.

다른 곳은 다 괜찮은데 지시를 내리는 곳 손가락, 발가락, 눈 깜빡임 같은 것으로 지시하는 곳 이 고장 났다고 보면 된다고 했다. 또 자율 신경계가 움직여주는 곳도 어느 정도가 고장 났는지 깨어나 봐야 알 수 있다고 했다.

숨골 부위가 워낙 위험한 부위라 짧으면 1주일 길면 5년까지 사는 분은 봤다며 우리나라 어느 병원을 가도 수술이 불가능하다고 했다. 의식이 없이 누워 있는 동안에도 하루 수도 없이 강직이 오고 열이 계속 38도에서 40도 사이를 왔다갔다했다.

쓰러지면서 시신경을 다쳤는지 왼쪽 눈이 튀어나오고, 충혈이 심하고, 눈에 물컹거리는 투명한 살도 눈을 감을 수 없어서 그런지 더 커지고 붉은 색으로 변해갔다.

 

이소성 골화증이 나다

6개월이 되는 날, 처음으로 눈동자에 초점이 맞아 잠시지만 나를 쳐다보았다. 의사들은 인정하지 않았지만 그때부터 조금씩 눈 맞추는 날이 조금씩 늘어갔다. 그런데 갑자기 왼쪽다리가 붓기 시작하더니 오른쪽 다리의 2배 반이 되게 부었다. 사진을 찍어보니 고관절과 엉치뼈가 한데 뭉쳐 그 주변의 근육까지 모두 석회화가 되는 이소성 골화증이라 했다.

골화증은 마비환자들이 잘 생기기는 하지만 이렇게 이런 부위에 크게 생기는 것은 흔하지 않는 듯했다.

지금까지 해오던 관절 운동을 하는 것이 좋다, 아니다 의사선생님들도 의견이 엇갈렸다. 이런 상황에서 병원에서 퇴원을 권유했다. 응급 상황도 아니고 병원에서는 더 해줄 것이 없다고 했다.

처음에는 낫지도 않은 환자를 쫓아내는 것 같아 황당했지만 2차병원을 알아보고 계속 물리치료를 받을 수 있는 집에서 가까운 산재병원인 창원 중앙병원으로 가게 되었다.

그곳에서도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씻기고, 밤새 가래 뽑고, 관절 운동해주고, 밥 먹이고, 열나면 얼음찜질하고, 증상 안 좋으면 약이 늘어나도 그 이상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병원에서는 기대할 수가 없었다.

생식과 영양식 캔의 자연적 비교

살아나야만 했고 조금이라도 호전이 된다면 의사 표시라도 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 집에 가서 선도체험기를 찾았고 그 책에서 생식원 연락처를 찾아 2004년 교육을 받게 되었다.

부산에서 사당동으로 1주일에 한번 6주 과정을 교육 받으러 다니면서 애 아빠에게 생식과 미네랄 소금을 처방 받아 먹이기 시작했다.

하루 3번씩 정확한 양을 먹였다. 먹는 동안에 천천히 강직하는 빈도도 줄어들고, 가래도 많이 줄어들어 새로운 합병증이 생기지는 않았다. 2008년 겨울 재생병원에 두 달 있으면서 육기 생식원에서 임상 시술을 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병원에 입원해 있으면서 병원에서 생식과 밥 갈아먹는 것을 문제 삼으며 캔으로 나오는 유동식을 먹이기를 강요했다. 피검사상 문제가 되는 것도 없었는데 인증되지 않은 생식을 먹인다면서 캔을 먹이자고 했다. 그래서 문제가 있을 때에는 우리가 먹이던 생식을 먹이기로 하고 유동식을 이틀간 먹이고 피검사를 하자 문제가 발생했다.

있지도 않던 당뇨가 나온 것이다. 그런데도 이틀 더 지켜봐 계속 당뇨가 나오면 당뇨 약을 먹이자 했다. 나는 처음 약속한 대로 문제가 생겼으니 생식을 먹인 뒤 검사를 해 당뇨가 나온다면 당뇨약을 먹겠다고 약속하고는 생식을 먹이고 검사하자 정상이 되었다.

그런데도 의사들은 인정하지 않고 영양학교수가 와서 영양학적으로 훨씬 좋은 유동식캔을 먹여야 한다고 계속 요청했다. 영양학적 결핍이 없다는 것을 피검사로 확인하고도 계속 옳다고 주장하는 그들을 더 이상 신뢰할 수 없었다.

이 검사로 생식의 위력을 더욱 실감하고는 더 열심히 생식을 먹이게 되었다. 2009년 개인 재활 병원으로 옮기면서 당시 생식원 부원장님이던 유연숙 선생님 댁에서 임상 시술을 시작했다.

매주 시술을 시작하면 보통 10시간 정도 전신을 시술했다. 머리, 얼굴, , 특히 고관절 부위는 그냥 뻣뻣한 나무토막 같았다. 시술을 하면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변화는 눈이었다. 썩은 동태눈 같은 눈알이 약간 촉촉하고 실핏줄이 적어졌다.

돌출된 눈이 서서히 들어가고 지금은 물컹거리는 살도 아예 없고 눈도 제자리를 잡아 눈이 튀어나와 있었는지 말을 안 하면 알 수 없을 정도이다.

처음에는 시술을 하고 괄사를 해도 통나무에 가죽 입힌 것처럼 딱딱했는데 시술이 1~2회 거듭될수록 5~6개월 후부터는 근육의 느낌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눈과 대퇴부의 변화가 오다

지금은 대퇴부 크기도 별 차이가 없고 휠체어에 앉는 자세가 많이 좋아졌다. 시술 전에 머리는 물컹거리고 울긋불긋하고 목도 두껍고 마치 딱딱한 복숭아가 물컹거리는 것 같았는데 지금은 많이 단단해지고 목도 날씬해졌다.

머리는 시술 전후 냉기가 들어가지 않게 항상 모자나 두건을 쓰고 있다. 냉기는 모든 병의 원인이기에 몸에 찬 곳이 없는지 구석구석 항상 확인한다.

시술을 할 때 냉기도 많이 나오고 하얀 알갱이가 섞여 나오기도 하고 실 같은 것이 나오기도 하고 매번 찌꺼기의 종류도 증상도 다양하고 시술 후 소변의 색과 냄새 찌꺼기도 또한 다양해졌다.

여러 가지 증상들을 경험하면서 왜 교육을 받아야 하는지도 알 수 있었다. 교육을 받고도 치료 후의 증상과 명현 반응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원장님이 계시지 않았다면 알 수도 없고 확신할 수 없었을 것이다.

손가락 하나도 까닥이지 못 했던 사람이 손에 힘이 생기고 왼쪽 손은 아주 반가운 사람이 오면 살짝 들어 악수를 하는 시늉도 하고, 휠체어에 앉아 있거나 누워 있을 때 옆에 사람이 오면 고개를 돌려 쳐다보기도 하고, 눈동자를 움직여 사람의 움직임을 따라가기도 한다. 그전에는 눈동자가 상하로만 움직였는데 지금은 좌우로도 약간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현재는 발병 후 들었던 말과는 달리 10년간 잘 살고 있고 시술 후 다른 합병증이 있거나 더 나빠지지 않고 계속 호전되고 있다.

당시 같은 중환자실에 입원했던 사람들은 우리보다 증상이 약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다 세상을 떠나고 없다. 임상시술을 받지 않았다면 지금과 같은 빠른 효과는 기대하지 못했을 것이다.

지금도 너무나 감사하고 있지만 앞으로도 계속 더 나아질 수 있다는 희망과 확신이 있기에 열심히 생식 먹고 시술 받고 운동치료 열심히 하고 있다.

황제내경을 기반으로 이러한 가르침을 주신 고 김춘식 원장님과 현재 오행육기 생식원을 이어받아 이끌어 오시는 김또순 원장님께 정말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이렇게 힘든 환자를 빠른 효과를 기대하기도 어렵고 시간이 많이 걸리며 뒤탈이 있을 수 도 있는 환자를 시술해 주시고 계속적으로 봐주시는데 감사드립니다. 또 옆에서 용기를 주고 항상 그림자처럼 붙어 도와준 우리 신경자 이모님에게 감사드립니다. 환자를 간병 하는 데는 3박자가 맞아야 된다고 한다.

치료하는 선생님과 간병하는 보호자와 먹는 음식(약포함) 우리는 다행히 삼박자가 맞아 여기까지 올수 있었다고 생각 합니다. 많은 사람 들이 오행육기 생식을 알고 공부하며 가족의 건강을 서로 돌보며 간단한 감기는 스스로도 고칠 수 있는 날이 오기를.